엄지용 | 2019년 7월 25일
택배 서비스는 ‘당일 집하’와 ‘익일 배송’을 목표로 움직인다. 한국의 택배 프로세스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고객주문이 발생하면, 이커머스 업체의 물류센터나 사무실에 보관된 상품을 택배기사들이 당일 집하해서 지역 대리점(서브터미널)에 모은다. 그것을 당일 늦은 오후까지 11톤 간선운송 트럭에 태워서 택배 허브터미널에 보낸다. 허브터미널에서 지역별로 분류된 화물이 다시 간선운송 트럭을 타고 익일 새벽부터 지역 대리점으로 내려온다. 지역 대리점에서 받은 화물을 택배기사가 최종 고객에게 익일 배송한다. 그 유명한 허브앤스포크 프로세스다.
국토교통부의 2018년 택배서비스 평가 결과에 따르면 배송률(집하량 대비 익일배송 건수)과 집하율(접수건수 대비 당일 및 익일 집하건수)을 집계한 결과치인 신속성은 96.3점으로 ‘서비스에 대한 문제점이 없는 매우 우수한 상태’로 조사됐다. 실제 CJ대한통운과 한진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업체들의 익일배송률은 통상 97~98%로 매우 높게 나타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오늘 내가 주문한 상품은 항상 내일 오지 않는다. 왜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재고가 없는 경우
이커머스 업체의 물류센터나 사무실에 재고가 없는 경우다. 이 경우 업체들은 고객 주문이 발생한 이후 공장에 제조 요청, 혹은 공급사에 발주 요청을 넣는다. 이 업체들이 재고를 오늘 바로 공급을 받을 수 있다면 오늘 발송도 가능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익일 배송은 어렵다. 때때로 공장이나 공급사의 사정으로 공급이 늦어지기도 한다. 쇼핑몰로부터 주문한 상품의 ‘발송 지연’, ‘입고 지연’과 같은 문자를 받았다면 대부분 이 경우라고 생각하면 된다.
첨언하자면 쿠팡 로켓배송이 자정까지 주문한 상품을 다음날 배송 가능한 이유는 물류센터에 ‘재고’가 있기 때문이다. 마켓플레이스(C2C 이커머스)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을 운영하는 업체들은 셀러들이 알아서 물류를 한다. 나는 한 이커머스 업체에서 구매했는데 여러 택배비를 개별 납부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셀러 중에는 재고를 보유하지 않는 셀러도 있다. 나는 한 이커머스 업체에서 여러 상품을 구매했는데 실제 상품을 받는 배송일은 제각각인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쿠팡에서 사더라도 로켓배송이 아니라면 배송일이 제각각일 수 있다. 쿠팡도 마켓플레이스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 ‘아이템마켓’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로 마켓플레이스 방식의 운영을 하고 있는 이베이코리아도 물류센터에 재고를 보관해두는 방식으로 물류를 운영하기도 한다. 이베이코리아 스마일배송 품목은 물류센터에 미리 재고를 보관해두는 방식으로 당일 오후 6시까지 주문한 고객에 대해서 익일배송의 속도를 보장한다. 사진은 이베이코리아의 스마일배송 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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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시간의 함정
이커머스 업체의 물류센터에 재고가 있지만 택배가 늦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이커머스 업체의 ‘마감시간’과 연결되는 문제다. 마감시간이란 해당 시간까지 받은 고객 주문을 당일 택배업체에게 출고 시킨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서 이베이코리아의 스마일배송은 마감시간이 오후 6시다. 그 시간 이후에 주문한 상품은 당연히 내일 안 온다. 그래도 이 경우는 통상 내일은 출고되고, 내일 모래에는 배송 받을 수 있는 편이다.
통상 이커머스 업체는 최대한 마감시간을 뒤로 미루고 싶어 한다. 그래야 더 많은 고객에게 빠른 배송을 선물해줄 수 있고, 재구매율을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이커머스 업체가 자정까지 받은 고객 주문을 택배업체에 넘긴다면 너무 좋겠지만, 택배기사도 사람이다. 밤에는 쉬고 싶다. 야밤까지 집하를 받아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커머스업체의 생산성
이커머스 업체의 생산성(Capacity)도 속도에 영향을 준다. 여기서 생산성이란 마감시까지 받은 주문을 택배 집하가 오기까지 피킹과 포장, 송장 출력 및 부착 등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냐는 것이 관건이다. 이커머스 업체는 매일매일 발생하는 주문수를 기준으로 수요를 예측해서 미리 물류센터에 인력을 배치해둔다.
기자가 티몬 물류센터에서 일할 당시에 찍은 사진. 이 카트를 끌고 방대한 물류센터를 돌면서 당일 발송될 상품을 픽업해야 한다. 피킹은 그냥 물건을 집어오는 것이지만, 전체 운영 프로세스와 인력을 생각하면 그렇게 만만한 업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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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수요예측은 말 그대로 ‘예측’이라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돌발변수가 예측된 수요를 뒤틀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마감시간이 오후 4시인 립밤을 파는 이커머스 업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날 오후 2시 국회 청문회가 있었고, 여기 출석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 업체의 립밤을 사용했다. 그것을 본 고객들의 주문이 마감시간 직전에 터져 나온다. 업체의 작업 공간은 한정적이고, 고용인원도 한정적이다. 당연히 한 시간에 포장을 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고, 그것을 넘어가는 주문 처리는 다음날로 밀려버린다.
첨언하자면, 이커머스 업체 중에서는 실제 출고와 동시에 바코드를 찍지 않는 업체들도 있다. 미리 바코드를 찍어놓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바코드를 실제 출고 전에 찍어 놓은 상품이 생산성 부족으로 물류센터에 잔류한다면 소비자는 시스템 상에서는 ‘당일 출고’ 됐다는 메시지를 받지만 물건은 정작 내일 안 오는 일을 겪을 수 있다. 실물 재고와 전산 재고가 불일치하는 현상이 이런데서 발생한다.
택배업체의 생산성
택배업체의 생산성도 속도에 영향을 준다. 택배업체는 이커머스 업체 기준으로 ‘출고(발송)’, 택배업체 기준으로는 집하 이후의 생산성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택배업체들이 하루에 처리하는 물량은 수백만개에 달한다. 당연히 여기에도 한계 생산성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한진의 백암 B2B터미널의 생산성은 시간당 8000박스, 일평균 10만박스다. 이 생산성을 넘어가는 주문이 들어온다면, 당연히 최종고객에 대한 배송은 지연된다. 물론, 통상 택배업체들은 일반적인 고객 수요에 맞춰서 ‘생산성’을 준비한다. 택배업체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물류센터를 열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택배 허브터미널의 모습. 자동분류기로 지역별로 택배상자를 분류하는 모습이지만, 하루 처리할 수 있는 생산성의 한계는 존재한다. 사진은 한진 백암 B2B허브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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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도 예외는 있다. ‘통상’이 아닌 경우다. 예를 들어서 지난해 CJ대한통운 대전 허브터미널의 안전사고로 인해 가동 중단이 된 상황. 택배박스는 평소와 동일하게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 물량을 처리할 물류시설은 멈춰있는 경우다. 당연히 배송속도에 영향을 주게 된다. 택배기사의 파업 등 공급자의 숫자가 줄어들어 생산성의 영향을 준다. 지난해 CJ대한통운은 허브 터미널 가동 중단과 택배기사 파업을 동시에 겪었으니, 당연히 ‘물류대란’이 예측됐던 거다. [참고 콘텐츠 : CJ대한통운 택배대란 눈 앞에… 간선차량 400대 멈췄다]
반대로 설날과 같은 ‘특수기’에는 공급 부족이 아닌 수요가 폭발해서 문제가 생긴다. 물론 평소에도 설날 물량에 맞춰 생산성을 준비해놓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건 업체 입장에서 분명한 낭비다. 때문에 택배업체들은 명절 특수기의 생산성을 맞추고자 전국에 있는 용차업체들을 총동원하는 진풍경을 보여준다. 당연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택배업체 본사 직원들도 명절에는 까대기 현장에 동원된다.
물류는 연결이 만들기에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앞서 설명한 ‘익일배송률’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산정됐냐는 것이다. 택배업체는 집하시점을 기준으로 익일배송률을 산정한다. 하지만 고객 입장에선 주문 시점부터 ‘익일배송’을 기대한다. 이 인식의 차이가 익일배송률이 97%가 넘는데, 우리가 오늘 주문한 택배가 내일 안 오는 현상을 만든다.
마무리다. 내가 오늘 주문한 택배가 내일 안 오는 것은 택배업체 하나의 잘못이라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택배업체만 잘해서는 고객 입장에서 완연한 ‘익일배송’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커머스 업체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공장에서 제대로 납기를 맞춰주지 못한다면, 고객에게 보낼 재고가 없으니 출고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이재용이 청문회에서 립밤을 발라서 주문이 터져 나오는 일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고객 주문부터 도착까지. 택배 프로세스를 만들기 위해 협력하고 있는 수많은 서로 다른 사업자들이 있다. 그래서 물류는 혼자서 할 수 없다. 연결이 만든다. 이 콘텐츠는 다수 택배업체와 이커머스 업체 관계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엮어서 작성했다.
글. 바이라인네트워크
<엄지용 기자> drake@byline.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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